정의란 무엇인가 2장에는 공리주의가 소개된다.
공리주의는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법 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이 처음 제시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모두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즉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벤담에 따르면 옳은 행위란 공리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킨다.
벤담은 인간은 모두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감정에 지배된다고 주장한다. 이 감정은 우리에게 통치권자와 같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는다. 공리를 극대화한다는 원칙은 개인의 행위뿐 아니라 입법자의 정책 결정에도 적용된다.
벤담에게 공동체란 허구의 집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의 총합일 뿐이다. 따라서 입법자들은 정책을 결정할 때, “이 정책으로 얻게 되는 이익의 총합에서 비용의 총합을 빼면, 다른 정책보다 더 행복이 커질까?”라고 자문해야 한다.
벤담은 모든 도덕적 주장은 반드시 행복 극대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고 봤다. 도덕적 논쟁은 결과적으로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의 문제일 뿐, 그 근본 원칙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벤담은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구빈원을 주장했다. 많은 거지들이 행인에게 혐오와 동정심이라는 고통을 주므로, 이들을 구빈원에 수용하여 사회 전체의 공리를 높여야 한다는 논리다. 거지들의 자유가 일부 제한된다 할지라도 사회 전체의 행복이 그 고통을 웃돈다면 정당한 정책이 된다.
즉,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정의의 척도로 삼으며, 결과를 계산해 도덕성을 판단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3장에는 자유지상주의가 소개된다.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고, 자기 소유권을 정의의 근거로 삼는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면 내 몸, 노동, 그리고 그 결과물인 소득도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부자의 소득을 세금으로 걷어 재분배하는 정책은, 개인의 노동 결과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자, 본질적으로 개인을 국가나 공동체의 소유물로 만드는 강제노동 혹은 노예제와 같다고 비판한다.
대표적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분배의 정의를 판단하기 위해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취득의 정의: 최초 자원 취득 과정이 정당했는가?
- 양도의 정의: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교환이나 자발적 증여로 부가 이전됐는가?
이 두 조건만 충족된다면, 그 결과 빚어진 빈부 격차는 아무리 커도 정당하다. 예컨대 마이클 조던이나 빌 게이츠가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은 소비자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것이므로, 국가는 소득을 재분배할 권한이 없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최소 국가를 지향한다. 국가는 계약 이행 강제, 도둑·사기·무력행위로부터 개인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는 기능 정도로 한정되어야 한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세 정책에 반대한다.
- 의무 안전벨트 착용처럼, 개인 보호 명분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온정주의
- 도덕의 법제화(동성애 처벌법 등)
- 부의 재분배를 위한 과도한 세금 정책
이들에게 정의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소유권이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5장: 칸트의 정의관
이마누엘 칸트는 정의와 도덕을 행복, 혹은 소유권과 연결짓는 시각을 거부한다. 그는 도덕이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준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 즉 진정한 자율이다. 만약 법칙이 욕구나 기호에서 온다면, 여전히 타율적이다. 오직 경험과 무관한 순수 이성, ‘정언명령’에서 오는 법칙에 따라야만 진정으로 자유롭다.
칸트는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판단할 때, 결과가 아니라 동기를 기준으로 삼는다. 옳기 때문에 행동하는 ‘의무 동기’에서 우러난 행위만이 도덕적이다. (예: 가게 주인이 나쁜 소문이 두려워 정직하게 행동하는 건 도덕적 가치가 없고,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만이 도덕적)
그가 제시하는 도덕법칙의 기준은
- 보편성의 원칙 :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 가능한 원칙이어야 하며
- 인간 존엄성의 원칙 : 타인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라
이 법칙에 따라 자살이나 살인은, 인간을 단순히 고통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대하므로 허용될 수 없다.
정의로운 법은, 특정 집단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만인의 사회계약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6장: 존 롤스의 정의론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무지의 장막’ 뒤에서 합의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본다. 현실의 계약은 협상력/정보/권력 불균형에 의해 왜곡된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이 부잔지, 가난한지, 건강한지, 어떤 재능과 인종을 타고날지 모르는 상황(원초적 입장)을 가정하고, 모두가 공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을 합의하게 될 것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이들은 공리주의/자유지상주의 대신 두 가지 원칙에 합의하게 된다고 본다.
- 평등한 자유의 원칙: 언론, 종교, 신체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하며, 사회적 효율이나 행복추구를 위해 희생될 수 없다.
- 차등의 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가장 약자(최소수혜자)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정당하다. (예: 의사에게 더 높은 보수를 주어 의료 서비스가 향상되고 가난한 이들도 혜택 보면 정당)
롤스는, 봉건제/자유지상주의/능력주의 모두가 출생·가정·재능 등 우연하고 임의적인 요소에 분배가 좌우된다는 이유로 정의롭지 않다고 본다. 개인의 노력조차도, 타고난 환경과 성향 덕일 수 있고, 부/명예에 대해 전적인 도덕적 자격을 주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재능을 공동의 자산으로 보고, 사회 전체, 특히 약자를 위해 재분배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8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단순히 법적 중립성이나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자격 있는 사람에게 그가 마땅히 받을 몫을 주는 것’이라고 본다. 핵심 개념은 목적론(텔로스)과 미덕이다.
어떤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먼저 그 재화의 목적(텔로스)을 파악해야 하며, 그 목적을 가장 잘 실현할 미덕을 가진 사람에게 분배해야 한다.
예시: 플루트의 목적은 훌륭한 연주를 위한 것. 따라서 최고의 연주자에게 플루트를 줘야 한다.
정치 철학에서도,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이성적으로 논의할 때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정치적 권력/영예 역시 미덕과 공동선을 잘 숙고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 목적과 사람의 역할 적합성을 강조한다. 심지어, 이성적으로 육체노동에 적합한 사람이 사회유지의 힘든 역할을 맡는다면 노예제도 정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강요에 의한 경우는 부당함을 인정했다. 그는 ‘개인의 본성과 사회의 목적에 적합한가’가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10장: 저자(샌델) 자신의 생각
마이클 샌델은 앞서의 자유주의적 정의론들이 도덕적 개인주의/가치중립적 정의를 전제한다고 비판하며, 공동체적 연대와 소속의 의무를 강조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자아’ 개념을 빌려오는데, 우리는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고민 없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샌델은 합의/계약에서 비롯된 의무 외에도,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연대/소속의 의무(가족, 조국에 대한 충성 등)가 있으며 이를 배제한 정의론은 인간 경험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대정치가 도덕/종교적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고 해도,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낙태, 줄기세포, 동성혼 논쟁 등) 결국 ‘좋은 삶에 대한 가치판단’을 회피할 수 없으며, 시민 모두가 이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는 게 샌델의 결론이다.
그는 시민의식/희생정신 교육, 시장의 도덕한계 설정, 연대 회복, 시민적 토론을 통한 도덕적 개입의 정치를 강조한다.
읽고 나서 – 나의 생각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평소 믿었던 가치관을 다시 점검해볼 수 있었다. 여러 정의론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곧이어 나오는 반박에 생각이 바뀌면서 정의란 것이 얼마나 복잡한지 체감했다.”
처음 벤담의 공리주의를 접했을 땐 명쾌한 논리에 감탄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객관적인 척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샌델의 반박을 접하고, 공리주의가 소수의 권리침해와 다수의 횡포, 전체주의로 귀결될 위험성을 깨달았다.
자유지상주의는 평소 내 성향과도 비슷했다.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국가 개입에 거부감을 보여왔다. 자기 소유권 개념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러나 장기 매매나 안락사 허용에 대한 논리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개인 자유가 중요해도 인간의 신체를 포기/거래할 권리까지 인정하기에는 도덕적 꺼림칙함이 있었다.
칸트의 의무론에도 공감했다. 결과나 보상이 아니라 그게 ‘옳아서’ 한다는 동기가 평소 내 모습과 닮았다. 타인을 그저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명쾌하다. 단, 선의의 거짓말조차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부분은 와닿지 않았다. 나는 상대방을 위하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칸트 철학은 도덕적 기반은 강하나, 현실적 한계도 느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샌델의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자인 나에게 다소 이질적이었다. 정의를 개인 문제로 파악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사적 자아 개념에는 설득력이 있었고, 내 직접 잘못이 아니더라도 공동체 과거의 잘못에 후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공동체적 책임을 외면하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그러나 샌델 논증 방식에는 아쉬움이 있다. 비판의 칼날은 날카로우나, 실제 제시하는 공동선의 정치란 개념은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구체적 쟁점(낙태, 줄기세포)이 등장할 때 그의 논리는 감정적 호소에 머무르기도 한다. 다른 사상들이 명확한 잣대를 제시하는 데 반해, 샌델 결론은 마치 “우리 모두 착하게 삽시다”라는 공익광고 같았다. 비판은 날카로웠지만 해답은 적었다.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공동선이 도대체 누구의 선인지,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불명확하다.
결국 내 결론은, ‘정답은 없다’였다. 나는 국가간섭이 싫은 자유지상주의 성향이면서, 의무를 중시하는 칸트주의자이고, 때때로 공동체적 연대도 중요하다고 여긴다. 어느 하나의 원칙에 맹목적으로 기댈 것이 아니라, 여러 가치(자유·행복·미덕) 사이에서 치열하게 균형을 고민하며 정의를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